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임노월이 작품활동을 했던 1920년대 전반기는 시대정신으로서의 ‘근대’가 지배했던 전형적인 시기로 근대사에서뿐만 아니라 근대문학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시기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연애의 열병에 달떠 ‘연애를 연애’하는 낭만의 시대였고 예술지상주의의 기치를 높였던 황홀한 열정의 시대였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연애’라는 근대적 형식의 사랑이 청춘의 감각을 대변하며 대중적인 유행어가 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조선 문단은 유미주의, 아나키즘, 다다이즘과 같은 세기말적 사상과 전위적인 문예사조의 세례를 받아 예술을 향한 열정에 도취되어 있었다. 구습(舊習)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명제였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연애’와 ‘예술’은 낡은 관념을 대체하는 낯설고도 새로운, 그러나 매혹적인 근대의 기호였던 것이다. 이때 일본 유학을 통해 오스카 와일드의 사상과 접하게 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 사상의 새로움에 열광했고, 와일드를 유미주의와 쾌락주의, 죽음을 찬미하는 퇴폐적인 작가로, 개인주의와 예술지상주의의 상징적 존재로 수용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 임노월은 와일드의 예술지상론을 자신의 문학적 신념으로 수용하고 일관되게 실천한 유일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술론을 죽음을 불사한 연애 서사를 통해 절대 신성의 경지에서 추구하고 옹호하려 했던 연애지상주의 작가이기도 했다.
임노월이 발표한 7편의 소설은 모두 당시 유행하던 남녀의 연애담을 표방하고 있다. 특히 1920년 ≪매일신보≫에 차례로 연재된 <춘희>, <위선자>, <예술가의 둔세>는 예술가의 꿈을 꾸던 남녀의 사랑이 현실의 장애 앞에 좌초되는 20년대 연애 서사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예술가 혹은 예술가 지망생, 조혼한 남성과 미혼 여성, 배신과 도피 혹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연애를 기본적인 서사 구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들은 ‘비애(悲哀)’라는 비극적 정조를 심미화하고자 했던 임노월 문학관의 적극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임노월에게 ‘비애’는 단순히 고통스럽고 슬픈, 부정적 정서가 아니라 ‘공포와 비통(悲痛)의 위대한 미(美)’를 구현하는 심미적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들 서사를 지배하는 것은 인물이나 플롯이 아니라 궁구(窮究)의 절대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격정적 찬미와 실패한, 혹은 실패할 연애에 대한 감상적 영탄이라 할 수 있다.
<춘희>는 ‘경성여자미술학교’ 입학을 앞둔 예비 예술가인 춘희가 유부남 병선과의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당시 유행하던 ‘감기’로 죽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감기’라는 물리적 요인이라기보다 조혼이라는 악습과 그로부터 비롯된 내면의 갈등과 고통이다. 현실에 패배하고 말 사랑에 대한 예감, 이 선험적 비관이 결국 사랑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위선자>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이창호와 미술학교 예비 입학생 순애의 사랑과 배신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도 순애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혼까지 불사하려는 창호의 순정이 재물에 이끌린 순애의 배신으로 짓밟힌다는 서사 자체보다는 연애의 신성성과 유일성이 훼손된 데 대한 창호의 고뇌와 순애의 참회라는 비탄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술가의 둔세(遁世)>에 등장하는 병호와 춘희도 각각 경성동양미술학교와 경성여자학원 음악과에 재학 중인 예비 예술가로서, 춘희가 병호의 초상화 모델이 되면서 연애 감정을 나누게 되나 끝내 유부남과의 사랑이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자 새로운 세계로 사랑의 도피 길에 오른다.
이 소설들에서 우리는 좌초된 사랑의 비극성을 예찬하는 임노월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임노월은 예술이야말로 인간에게 비애의 미를 전달해 개인의 인격적 성숙을 이끌 수 있는 절대적 경지라고 했다. 여기서 연애의 비극성은 예술의 비애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둔세>에서 춘희의 초상화가 구현하는 예술의 비밀과 춘희와의 ‘로맨스’라는 비밀을 동일한 층위에 놓음으로써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생의 비밀’을 담보한 새로운 가치로서의 예술과 둘만의 은밀한 비밀인 연애가 유비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병치되고 있는 것이다.
임노월은 ‘비애’라는 극단의 심미성을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연애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다. 이제 연애는 슬픔과 좌절을 넘어 치명상(致命傷)을 남긴다.
임노월에게 죽음은 구극(究極)의 미(美)를 맛볼 수 있는 감미로운 경험이자 진정한 비애의 경지이기에 적극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비애가 악마 혹은 마녀의 성정인 만큼 마녀는 비애로부터 ‘절대고귀의 향락’을 가르쳐주고, ‘무한한 신비와 영원’, 즉 죽음으로 이끄는 매혹적인 존재로 이해된다.(<불멸(不滅)의 상징(象徵)>, ≪개벽≫, 1922. 9)
1924년에 발표한 소설들-<지옥 찬미>를 비롯한 <악마의 사랑>, <악몽>, <처염>에서 임노월은 이와 같은 ‘악’의 세계를 찬미하면서 지옥과 ‘악마’의 존재를 탐색하고자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들은 임노월의 악마주의(惡魔主義)적 예술관이 빚어낸 독특한 인물형과 플롯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희소성을 띠는 경향의 작품이라 평할 만하다.
<지옥 찬미>는 ‘독약’을 먹고 정사(情死)를 한 연인이 죽음을 앞두고 나눈 대화를 통해 우화적으로 죽음을 예찬하고 지옥을 찬미하는 소품이다. 이에 따르면 가장 아름다운 미는 지옥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악마는 행복이라는 ‘허영적 향락’으로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하는 신(神)에 비해, 보다 본질적인 감정의 약동이 충만한 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다. 이럴 때 정사(情死)야말로 연애의 승리이자 예술의 승리이자 악마의 최후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악마의 사랑>은 요부형 여성인 영희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나’가 끝내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영희는 아내인 정순과 달리 “요염(妖艶)한 미모(美貌)와 살가운 표정(表情)과 상긋한 젓가슴의 향기(香氣)”를 지닌 유혹자이며, 그런 영희와의 연애는 그 자체로 “위험(危險)한 비극성(悲劇性)을 가진 애정(愛情)”이기에 더 자극적이고 치명적이다.
<악몽>의 S도 “요부적(妖婦的)의 기질(氣質)과 복잡(複雜)한 성미(性味)”, “풍염(豊艶)한 몸매”의 여성으로 “여러 남자(男子)에게 사랑을 밧겟다는 허영심(虛榮心)”까지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나’는 S의 ‘창부적(娼婦的)’ 기질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사랑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모멸감과 질투심으로 삼각관계에 놓여 있던 연적 H를 독살하게 된다.
<처염>에는 “여러 사내에게 귀염을 밧는” “매운 독(毒)” 같은 여자와 그녀에게 매혹되어 병을 얻고 악몽에 시달리다 죽음과 맞닥뜨리게 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 이때 ‘나’의 병은 “사악(邪惡)하고 생기(生氣)를 죽이는 그 무엇”을 가진 여자의 마력(魔力)에 빠진 대가다.
이처럼 임노월의 소설에서 ‘악’의 존재는 치명적 사랑에 빠진 ‘나’ 자신(<악마의 사랑>)이면서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여자(<처염>)인 동시에 연애 그 자체(<악몽>)이기도 하다. 일찍이 임노월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살로메≫와 같은 오스카 와일드 작품의 영향을 받아 ‘죄악’과 같은 이단적인 행위도 ‘예술의 관능을 자극하는 수단’이 된다면 용인될 수 있다는 예술관을 펼쳐 보인 바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사랑은 ‘독(毒)’인 줄 알면서도 삼키는 ‘약(藥)’과 같다. 그리고 ‘나’의 정열을 자극하는 관능적 연애 대상인 팜므파탈형 여성들은 악의 세계를 체현한 존재들로 임노월이 추구했던 절대미의 현현일 뿐이다. 악마들의 행위인 연애는 그래서 더 매혹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노월에게 ‘악마’는 매혹을 은폐하는 조작된 이미지가 아니라 금기가 무엇인지, 금기 너머의 은밀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론과 유미주의를 자신의 문학적 신념으로 수용하고 일관되게 실천한 유일한 작가인 임노월의 작품들은, 우리 문학사가 리얼리즘의 문학적 전통을 확립하던 시기로 주목해 왔던 1920년대 문학계가 실상은 낯설고도 불온한 사상들에 뜨겁게 매료돼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지은이
임노월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300석 규모의 논과 2만여 평에 달하는 과수원을 보유한 지주 집안 출신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유학을 통해 근대 문명의 세례를 경험했던 것처럼 임노월 역시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에서 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도요(東洋)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서구의 예술과 철학에 심취했다. 그리고 이때 접한 유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사상에 깊이 공명한 임노월은 1920년 1월 24일 <춘희>(≪매일신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여 1925년 <무제>(≪동아일보≫)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할 때까지 ≪매일신보≫와 ≪개벽≫, ≪영대≫ 등의 지면에 와일드의 예술관을 포함해 서양의 표현주의 예술론을 소개하고 소설 창작에 몰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특히 1920년 ≪매일신보≫에 차례로 연재한 <춘희>(1. 24∼29), <위선자>(3. 2∼8), <예술가의 둔세>(3. 13∼18)와 같은 탐미적 성향의 소설들은 임노월의 예술지상주의 입장을 천명하는 문학적 실천의 증거라 할 만하다. 1921년 와일드의 학설을 소개할 만한 비평가로 ≪창조≫에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임노월은 1923년 7월 ≪개벽≫에 <사회주의와 예술: 신개인주의의 건설을 칭함>이라는 평론을 통해 “주관적 또는 개인적 미의식에서만 살 수 있는 개인주의의 세계”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신개인주의’를 제창한다.
이후 임노월은 ≪영대≫로 지면을 옮겨 창간호부터 1924년 12월 4호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으면서 ‘야영(夜影)’, ‘마경(魔境)’ 등 유미주의 색채가 짙은 필명을 사용해 <예술지상주의의 신자연관>(1924. 8), <미(美)의 절대성>(1924. 10), <예술과 계급>(1924. 12), <예술과 인격>(1925. 1) 등의 논문과 비평을 발표했다. <지옥 찬미>(≪동아일보≫,1924.5. 19, 26)를 비롯해, ≪영대≫에 실린 소설 <악마의 사랑>(1924. 9), <악몽>(1924. 10), <처염>(1924. 12) 등은 임노월의 악마주의 예술관을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성격의 소설들이다.
1925년을 전후로 문단에서 예술지상주의가 쇠퇴하고 민족주의 문학과 사회주의 문학으로 이분화되면서 작가들이 서둘러 입장을 선회하던 때 임노월은 절필을 선언하고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유미주의가 하나의 사조로 자리매김되지 못했던 우리 문학사의 진로에 비추어 볼 때 임노월의 짧은 문학 활동이 남긴 아쉬움은 크다. 그간 김명순, 김원주와의 잇단 스캔들과 여기서 파생된 불명예스런 소문들은 문학가로서 임노월의 이름을 지워왔고, 주류 문학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로 문단 내 권력은 그 문학적 성취를 폄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갈피리를 불고 ‘갈대 잎(蘆)’으로 배를 만들며 놀던 ‘달(月)’빛의 추억을 그리던 노월(蘆月)의 미감(美感)이 그의 생애와 오버랩되면서 비수(悲愁)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임노월이 유미주의라는 일관된 문학적 신념을 실천한 작가로 재평가됨으로써 문학사에서 그 지위가 복원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엮은이
임정연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20년대 연애담론 연구-지식인의 식민성을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920년대 ‘연애’의 공론화 과정을 추적하고 연애서사를 분석하여 ‘연애’가 배타적인 독서경험을 통해 구성된 지식인의 특권적 소통 형식이라는 점을 규명한 논문이다. 기존의 연구가 ‘연애’를 근대 체현의 특수한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해 왔던 것에서 나아가, 연애를 식민 담론의 제도적 장치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당시 유행했던 연애 열풍의 실체에 대한 성찰적 시각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임노월의 소설에서 팜므파탈형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욕망과 공포, 호기심과 거부라는 이중의 시선을 포착, ‘악마’라는 수사와 ‘관음’의 현장이 어떻게 대상에 대한 매혹을 은폐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의 심리적 기저에 일관되게 작동하는 ‘고결함’이라는 특정한 관념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고결함(respectability)’이야말로 지식인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보존하는 자기 존중의 원리라는 판단에 따라 근대, ‘지식과 문화’, ‘식민성’을 핵심적 의제로 하여 지식의 동향과 지식의 편성 과정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 가운데 ‘연애’와 ‘취미’ 담론은 근대문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데 효과적인 밑그림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홍명희의 “임꺽정” 연구>, <1920년대 연애담론 연구-지식인의 식민성을 중심으로>, <근대성의 경험과 근대 극복의 신화-이광수 “사랑”론(論)>, <‘회복’의 서사와 ‘축제’의 현상학-황석영 “손님”론>, <‘환멸’의 시간과 낭만주의적 욕망의 탐구>, <1920년대 연애담론과 지식인의 식민성-‘아내’와 ‘기생’의 서사적 재현 방식을 중심으로>, <식민지 지식인의 연애와 일상>, <연애 불능에 관한 역설: 나르시시즘에서 타자성으로>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춘희(春姬)
위선자(僞善者)
예술가(藝術家)의 둔세(遁世)
지옥 찬미(地獄讚美)
악마(惡魔)의 사랑
악몽(惡夢)
처염(凄艶)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리고 形式的인 繁文縟禮도 因習 道德도 常識 구린내 나은 合理主義도 다− 버셔나셔 宇宙의 本然性과 平凡한 것을 意味잇게 하난 神秘主義와 純雅한 情緖 世界로 가야만 되겟다.
-<예술가의 둔세>